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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중 현지의 열쇠에 대한 호기심과 관광상품 악세사리 이야기

10여 년 전만 해도 해외여행을 가면 열쇠고리를 기념품으로 사오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주변에 선물하기 위해서입니다. 하지만 지금 한국에서는 아무도 안 삽니다. 대한민국에서 열쇠가 사라져 버려 쓸모가 없기 때문입니다. 2010년도 경부터 디지털 도어락이 대중화되면서 부터입니다.

하지만 우릴 제외하곤 거의 모든나라들이 여전히 열쇠를 사용 중입니다. 유럽에서 에어비앤비를 가면 적어도 서너개의 묵직한 열쇠를 건네줍니다. 공동현관 열쇠가 있고, 집 열쇠가 있고, 각 방의 열쇠가 있습니다. 어떤 곳에선 엘리베이터 열쇠를 따로 주기도 합니다. 집 밖을 한 발자국이라도 나가려면 이 열쇠들을 모두 챙겨가야 합니다. 문이 자동으로 닫혀 밖에서는 절대 열 수 없기 때문입니다. 열쇠를 오른쪽으로 두 바퀴, 왼쪽으로 한 바퀴, 다시 오른쪽으로 반 바퀴... 이런 식으로 문을 여는 방식도 달라 적응하는 데도 한참이 걸립니다.

만약 여행 중 이 열쇠를 잃어 버렸다면 그건 정말 재난입니다. 열쇠 수리공을 불러도 쉽게 오지도 않습니다. 온다고 해도 워낙 인건비가 비싸서 무조건 200유로(약 26만원)는 날렸다고 생각해야 합니다. 하필 주말이라면 할증도 붙습니다. 그게 특수 열쇠였다면 문을 부숴야 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면 무조건 1,000유로(약 130만원) 이상입니다. 이것만 해도 최악은 아닙니다. 만약 잃어버린 열쇠가 다수가 쓰는 공동현관이라면 그건 상상도 하기 싫습니다. 그러면 건물 내 모든 집의 열쇠를 다 바꿔줘야 하고, 잃어버린 사람이 배상해야 합니다. 그래서 유럽 사람들은 집 계약과 함께 열쇠 보험을 들어 놓습니다. 유럽에선 열쇠가 금보다 비싸다고 괜히 말하는 게 아닙니다. 여행자들은 그나마 낫습니다. 유럽인들은 기본적인 서너개의 집 열쇠 외에 우편함과 지하창고, 주차장과 자동차, 사무실까지 합치면 보통 열 개 정도의 열쇠를 가지고 다녀야 합니다. 유럽의 열쇠들은 대개 우리보다 커서 이 정도 숫자면 꽤나 묵직합니다. 이쯤되면 한번씩 생각합니다. 우리처럼 디지털 도어락을 쓰면 이런 불편을 감수하지 않아도, 이런 수고로움을 반복하지 않아도 될텐데... 도대체 왜 이들은 우리처럼 편리한 디지털 도어락을 쓰지 않는 걸까요? 

디지털 도어락을 설치하지 않는 이유

여러 가지 이유 중 우선 주거환경이 우리와 다르다는 점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유럽은 우리와 달리 단독주택에서 사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도어락이 외부에 노출된다는 얘기입니다. 이럴 경우 전자 장치인지라 빗물이 들어가면 고장이 자주 나기 때문에 꺼려할 수밖에 없습니다. 공동 주택의 경우 개인 소유가 아니라 회사가 소유한 아파트에서 월세 사는 사람이 많습니다. 회사 입장에선 굳이 값비싼 디지털 도어락을 설 치할 이유가 없습니다. 자칫 작동이 안 되거나 해킹을 당해서 강도가 들 경우 거액의 소송을 당할 수도 있으니 이런 부담을 안으려고 하지도 않습니다. 가격이 비싸다는 것도 디지털 도어락 설치를 망설이게 하는 이유입니다. 유럽의 경우 가격이 보통 300~500유로 사이(40~65만원)입니다. 유럽에선 할부 제도가 우리처럼 발달되어 있지 않습니다. 더구나 임대 사는 사람이라면 이사 갈 때 원상복구를 하는 비용이 또 별도로 들어가므로 큰 부담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리고 기질의 차이도 있습니다. 우리나라에선 어떤 트렌드가 만들어지면 많은 사람들이 따라하기 때문에 단기간에 전체로 퍼지는 경우가 있습니다. 하지만 유럽에선 좀처럼 이런 일이 잘 일어나지 않습니다. 도어락의 편리성이 알려지더라도 쉽게 널리 퍼지지 않는 것입니다. 일부 도시에선 도어락 설치가 아예 불법인 곳도 있습니다. 화재를 대비하기 위한 것입니다. 공동주택의 경우 마스터키를 아파트 관리실에 갖고 있거나 아예 소방서에서 갖고 있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런 곳에선 처음 아파트를 지을 때 만들어진 자물쇠와 열쇠 외에는 그 어떤 것도 개별 설치가 불가능합니다.

 

유럽인들의  열쇠에 대한 사고방식과 생활습관

유럽인들의 보수적인 삶의 방식도 분명 한 몫 합니다. 유럽인들은 오랫동안 전해져 내려 온 것은 좀처럼 바꾸려고 하지 않습니다. 열쇠는 물론 아직도 신용카드보단 현금 위주이고, 가판대에선 여전히 종이 신문이 잘 팔리며, 대부분의 문서를 이메일보단 우편으로 보내는 게 유럽입니다. 좋게 얘기하면 전통을 중시한다고 할 수도 있지만 대부분의 유럽인들은 새로운 것에 대한 두려움이 있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아직 디지털 기기를 잘 믿지 않습니다.

한 조사에 의하면 화재 발생 시 디지털 도어락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을 것이란 불안감이 가장 크다고 합니다. 불이 나면 자동으로 오픈되는 도어락이 수두룩하지만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더구나 비밀번호 노출에 대한 걱정도 커서 열쇠가 불편해도 디지털 기기보다 방법에 더 좋다는 믿음이 잘 깨지지 않습니다. 유럽인들에게 열쇠가 갖는 역사적인 의미도 무시할 수 없습니다. 자물쇠와 열쇠는 기원전 4,000년 경에 메소포타미아 지역에서 발명 돼 이집트로 건너갔다가 이게 그리스 로마로 전해졌습니다. 당시 로마에선 열쇠를 가지고 다니는 게 부의 상징이었습니다. 아무것도 없는 일반 백성들과 달리 열쇠를 가지고 있다는 건 지켜야 할 물건도 많다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로마 이후 유럽 각국으로 퍼진 자물쇠와 열쇠는 지금으로 치면 첨단 보안 산업과 같았습니다. 당시 제작자들은 품질의 우수함을 과시하기 위해 정품 키 외의 다른 열쇠로 자물쇠를 여는 사람에게 상금을 주기도 했습니다. 오늘 날 디지털 기업에서 자신들이 만든 보안 프로그램을 뚫는 해커들에게 상금을 주는 것과 똑같은 방식입니다. 이렇게 발전한 유럽의 열쇠는 점차 행운을 상징하게 되었습니다. 열쇠가 마녀를 쫓는 부적으로 쓰이거나, 순산을 위해 임산부에게 쥐어 주거나, 심지어 불을 빨리 끄기 위한 주술의 용도로 사용된 게 모두 이런 상징성 때문입니다. 이런 상징성이 아직도 남아 있는게 외국의 귀빈이 오면 흔히 주는 '행운의 열쇠' 입니다. 그 외에도 열쇠는 지배권을 상징하기도 합니다. 이는 카톨릭의 총본산인 로마교회를 만든 베드로가 천국의 열쇠를 가지고 있다는 것에서 유래합니다. 바티칸의 광장이 하늘에서 보면 열쇠 모양인 게 이런 이유에서입니다. 이 때문에 중세엔 성문의 열쇠를 바치는게 공식적인 항복 의식이었습니다. 다시 말해 열쇠는 유럽인들에겐 행운을 가져다주는 부적인데다, 집에 대한 소유권을 의미하기 때문에 열쇠를 포기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한국인이 생각하는 열쇠에 대한 사고

뭐니 뭐니 해도 개인적인 생각으론 유럽이나 미국이 디지털 도어락을 사용하지 않는 이유는 써보지 않아서입니다. 써보지 않았기 때문에 그 편리함을 실감하지 못하는 것이고, 그러니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는 것입니다. 마스크 착용 경험이 없어서 코로나 시대에도 마스크를 쓰지 않는 것과 비슷하다면 좀 심한 비유일까요?

사실 유럽인들은 왜 디지털 도어락을 쓰지 않을까라는 질문은 잘못되었습니다. 이걸 쓰는 나라가 전세계에서 한국과 중국 뿐이기 때문입니다. 미국은 유럽과 비슷한 이유이고, 일본과 대만은 잦은 지진으로 도어락이 오작동하지 않을까라는 두려움이 있어서입니다. 때문에, 그럼 왜 한국은 거의 모든 곳에서 디지털 도어락을 사용할까? 라고 질문해야 맞을 것 같습니다. 사실 디지털 도어락을 맨 처음 만든 나라가 우리입니다. 1997년 한 기업이 일본의 디지털 잠금 기술을 배운 후 이를 응용해 도어락이라는 제품을 만들었다고 합니다. 중국의 경우는 2013년 김수현과 전지현이 나왔던 드라마 '별에서 온 그대' 가 대히트를 치면서 급성장했다는 얘기가 있습니다. 아마 이 드라마에 PPL로 등장한 삼성 디지털 도어락이 멋쪄 보였던 모양입니다. 한국은 유럽과 미곡과 달리 아파트와 빌라 같은 공동주택에 사는 사람이 대다수입니다. 디지털 도어락이 설치되기에 딱 적합한 환경입니다. 무엇보다 한국은 디지털에 대한 거부감이 별로 없습니다. 오히려 아날로그보단 현대적인 하이테크를 무척 신뢰하는 분위기입니다. 유럽인들과 달리 새로운 것에 대해 두려움보단 호기심이 더 큰 편이지요. 그래서 아파트 건설과 IT 벤처 붐이 동시에 일었던 2000년대 초부터 디지털 도어락이 본격화된 것입니다. 열쇠엔 분명 아날로그적인 감성과 낭만, 오래된 것에 대한 정서적인 안정감이 있습니다. 하지만 이미 편리함에 맛 든 한국인들은 유럽의 열쇠를 보면 답답하기부터 한 게 사실입니다. 어쩌면 한국은 국민 전체가 얼리어답터들인지도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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