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1492년 이베리아 반도에서 이슬람을 몰아내는 레콩키스타가 마무리되고 같은 해 콜롬버스가 소위 "신대륙을 발견하면서 스페인은 자국의 역사에서 다시 없을 전성기를 맞이합니다.

이토록 큰 규모의 식민지를 갖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스페인은 왜 계속해서 유럽의 대표적인 강대국으로 남지 못했는가라는 것입니다. 긴 역사적 맥락에서 봤을 때 스페인이 패권국가로서 몰락해가는 과정은 이미 16세기 후반부터 시작됩니다. 여기에는 우선 자연적인 요인으로 벌어진 인구감소가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흔히 우리는 흑사병으로 알려진 페스트를 생각할 때 14세기 중반의 유럽을 떠올리지만 페스트는 그 이후에도 유럽 내에서 반복적으로 발병했습니다. 이는 스페인의 경우도 마찬가지였고, 1598년부터 1602년까지 이어진 스페인 내에서의 페스트 확산으로 스페인 중부의 카스티야 지역에서만 50만명이 넘는 이들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게다가 17세기 전반에는 지속적으로 나쁜 기후로 인한 흉작이 반복되었는데, 페스트가 발병한 상황에서 농사도 제대로 이뤄지지 못하자 사람들의 면역력은 더욱 떨어졌습니다. 이는 페스트가 끝난 이후에도 다른 전염병들이 발병하는 결과로 이어졌습니다. 이렇게 전염병과 흉작이 반복되면서 1598년 대략 830만 명이었던 카스티야 지역의 인구는 17세기 후반부에는 660만 명으로 오히려 크게 줄어들게 됩니다.

100년 사이에 인구가 20% 가까이 감소한 것입니다. 그런데 스페인의 경우 인구 감소가 이처럼 오직 자연적인 요인으로만 벌어진 것은 아니었습니다. 1609년, 스페인의 왕 펠리페 3세는 스페인 내에 살고 있는 기독교도들 중에서 조상이 이슬람교를 믿었던 이들을 추방하라는 명령을 내립니다.

펠리페 3세가 이런 무리한 명령을 내린 데에는 우리가 흔히 짐작할 수 있는 종교적 이유에 따른 탄압 외에도 다른 이유가 있었습니다. 당시 지중해에는 북아프리카 지역에 기반을 가진 해적들이 많았는데, 펠리페 3세는 스페인 지역 내에서 이슬람 조상을 가진 이들이 북아프리카 해적들과 밀통할지도 모른다는 의심을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모리스코라 불리는 이들은 스페인 내에서 특히 경제적으로 활발한 활동을 하던 계층이었기 때문에 이들을 모두 추방한다는 것은 스페인 경제에 매우 좋지 않은 영향을 끼쳤습니다. 대략 30만 명에 가까운 이들이 펠리페 3세의 명령으로 스페인 밖으로 추방되었는데 특정 도시나 지역에서는 인구의 15% 가까이가 이 명령으로 사라졌습니다.

그런데 자연재해와 강제추방으로 전국적으로 인구가 크게 감소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왕과 귀족들이 머무는 궁 내에서는 위기감이 제대로 자각되지 않았습니다. 궁 내에서는 대규모의 사냥놀이와 오락을 비롯한 사치스러운 생활이 지속되었고, 이는 역설적으로 예술을 비롯한 고급문화의 발전을 가져왔습니다.

궁 밖에서 전국적으로 인구가 계속 감소하고 있을 때 궁 내에서는 역사학자들이 "스페인 예술과 문학의 황금기" 라 부르는 시대가 도래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궁 안과 밖의 이런 괴리는 영원할 수 없었습니다. 무엇보다도 스페인 내에서의 경제 침체로 세수가 크게 줄어들기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사치스러운 궁전 생활을 계속 이어나가기 위해서는 돈이 계속 필요했기 때문에 스페인 관료들은 곧 가장 쉽게 떠올릴 수 있는 해결책을 시행했고, 이는 돈을 찍어내는 것이었습니다.

스페인 정부에서는 곧 가치가 낮은 구리로 동전을 만들어내기 시작했고 이는 당연히 감당하기 힘든 인플레이션으로 이어졌습니다. 동시에 아메리카를 비롯한 식민지에서 더 많은 세금을 징수했을 뿐만 아니라 각종 관직을 공식적으로 돈을 주고 판매하기까지 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마지막 조치, 즉, 관직을 돈을 주고 판매하는 것은 오늘날의 관전ㅁ에서 보자면 좋게 보기 힘든 정책이지만 당시에는 생각지 못한 긍정적인 효과를 불러오기도 했습니다.

지금과 비교했을 때 매우 경직된 신분제 사회에서 경제적으로 부를 쌓았지만 정치적으로는 힘을 얻지 못했던 계층의 사람들이 관직을 돈을 주고 구매함으로써 공식적으로 신분상승을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관직매매는 의도치 않게 사회적 계층 이동이라는 측면에서 약간의 유연함을 가져다 주었던 것입니다.

돈을 찍어내고, 세금을 더 징수하고, 관직을 판매하는 것은 결코 지속적인 대책이 될 수 없었습니다. 때문에 1621년 즉위한 펠리페 4세는 스페인의 경제구조를 근본적으로 개혁하려는 시도를 합니다. 우선 왕실의 쓸데없는 지출을 줄이려고 했고 이를 통해 그동안 왕실이 가지고 있던 대량의 빚을 조금씩 갚아 나가고자 했습니다.

이와 더불어 오늘날 우리가 중상중의라 흔히 부르는 정책, 그러니까 수출을 최대한 많이 하고 수입을 최대한 줄이는 방법을 통해서 재정건전성을 늘리고자 했습니다. 그런데 여기에는 한 가지 문제가 있었습니다. 인위적으로 정책을 통해서 수출을 늘리고 수입을 줄이기 위해서는 스페인 내의 다양한 지역에서 벌어지고 있는 무역을 통제할 수 있는 중앙집권적 행정체제가 필요했던 것입니다.

아무리 중앙의 왕과 관료들이 수입을 줄이라고 명령해도 지방에서 실질적으로 이를 따르지 않으면 효과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때의 스페인에서는 왕이 지방에까지 경제정책을 강제할 수 있는 행정력이 없었다는 점입니다. 게다가 펠리페 4세와 그의 관료들은 경제개혁을 하면서 지방 귀족들의 특권을 줄이고자 했는데 이는 지방세력의 강력한 반발을 야기합니다.

마드리드에 있는 왕과 지방에 있는 귀족들의 관계 악화는 스페인이 유럽 무대에서 프랑스를 비롯한 다른 국가들과 패권경쟁을 할 때, 치명적인 결과로 다가왔습니다.

예를 들어 16040년대, 스페인은 프랑스, 스웨덴, 그리고 스페인으로부터의 독립을 시도하던 네덜란드와 전쟁을 벌이고 있었는데, 지방의 귀족들은 전쟁을 위한 노력에 협조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마드리드의 입장에서 봤을 때 적이었던 이들과 같은 편에 서버리기까지 합니다.

카탈루냐 지역의 귀족들이 스페인과 프랑스의 전쟁에서 마드리드와 관계를 단절하고 프랑스의 루이 13세를 자신들의 군주로 인정했던 것입니다. 게다가 1640년에는 1581년부터 같은 왕국에 속해 있던 포르투갈이 스페인으로부터 독립해 떨어져 나갔는데, 이는 반복된 세금 인상으로 인한 포르투갈 지역 내의 반 스페인 감정에서 비롯된 것이었습니다.

마드리드에서는 군사력을 통해서 포르투갈을 다시 통합하고자 병력을 파견했지만 포르투갈이 프랑스, 그리고 잉글랜드와 손을 잡음으로써 이는 실패합니다. 일너 일련의 과정은 1620년대부터 시작된 개혁시도가 사실상 실패했다는 것을 보여줬을 뿐만 아니라 유럽과 세계무대에서 패권경쟁을 하고 있던 스페인이 사실은 내부에서조차 제대로 통일되어있지 않았다는 것을 잘 보여주는 사건이었습니다.

최근의 역사학자들이 이 시기의 스페인을 "monauquia compuesta", "구성된 왕국" 이라고 부르거나 "las Espanas", "스페인들" 이라고 복수라 칭하는 것은 이런 모습 때문입니다.

카날루냐 지역은 간신히 진압되었지만 네덜란드와 포르투갈은 독립해 나갔고, 남부의 안달루시아 지역에서는 1647년부터 1652년까지 지속적으로 정치적 반란과 기근에 따른 폭동이 발생하는 상황에서 프랑스와의 전쟁은 계속 되었습니다. 유럽 무대에서의 패권 경쟁에서 밀려났다는 것을 인정하지 못한 채 계속 이어지는 전쟁은 감당할 수 없는 재정적자로 이어졌습니다.

이 시가의 적자가 얼마나 심각했는지는 무려 20만 개의 각종 관직이 스페인 사람들 뿐만 아니라 유럽 전역의 사람들에게 매매되었다는 것에서 상징적으로 알 수 있습니다. 인구의 3% 정도에 해당하는 관직 숫자가 돈을 받고 내국인 외국인 가리지 않고 판매된 것입니다. 이런 조치에도 불구하고 늘어나는 빚을 감당할 수 없어서 스페인 왕은 1627년, 1647년, 그리고 1652년에 빚에 대한 이자를 지불하지 못하고 국가재정파탄을 선언해야 했습니다.

결국 1659년, 스페인은 20년 넘게 지속된 프랑스와의 전쟁을 마무리하면서 피레네 산맥을 두 국가의 국경으로 삼는다는 피레네조약에 서명해야 했습니다. 많은 역사학자들이 피레네조약을 기점으로 유럽 대륙에서의 패권이 사실상 스페인에서 프랑스로 넘어왔다고 평가합니다. 피레네조약으로 유럽의 패자 자리에서 밀려난 스페인이었지만, 국력이 약해진 것이 드러나자 이제는 다른 국가들이 스페인을 내버려두지 않았습니다.

1700년, 원래부터 각종 유전병으로 건강이 안 좋았던, 스펭니의 왕 카를로스 2세가 아들 없이 사망하자 스페인의 왕위 계승을 둘러싸고 프랑스와 신성로마제국을 양축으로 유럽 국가들이 전쟁을 시작한 것입니다. 프랑스는 루이 14세의 손자이자 카를로스 2세가 사망 직전 왕위계승자로 지명한 필립을 스페인의 왕으로 내세웠고, 신성로마제국은 황제 레오폴트 1세의 둘째 아들이자 이후 황제가 될 카를 6세를 후계자로 내세웠습니다.

문제는 이때에 프랑스와 신성로마제국와 같은 외국뿐만 아니라 스페인 내부에서조차 누구를 왕으로 인정해야 할지를 두고 갈등을 겪었다는 점입니다. 중앙세력은 프랑스를 등에 업은 필립, 스페인식으로 펠리페를 지지했고, 지방세력들은 카를, 그러니까 카를로스를 지지했습니다. 이는 동시에 각 세력이 지향하는 미래의 국가 모습을 대변하는 것이기도 했습니다.

중앙세력은 프랑스식에 가까운 중앙집권화된 국가를 원한 것이고, 지방세력은 신성로마제국에 가까운 지방분권화를 꿈꾼 것입니다. 즉, 100년 넘게 갈등을 겪었던 중앙과 지방의 갈등이 여전히 해소되지 못하고 또 다른 형태로 표출된 것입니다. 우여곡절 끝에 펠리페 5세가 최종적으로 스페인의 왕으로 인정되었지만, 1714년 이 전쟁을 마무리하는 위트레흐트 조약을 통해 스페인은 강대국들의 자체적인 합의에 의해 아직까지 가지고 있던 일부 네덜란드 지역, 밀라노를 비롯한 북이탈리아 지역, 나폴리를 비롯한 남이탈리아 지역, 메노르카 섬, 지브롤터 그리고 시칠리아 섬 등을 내주게 됩니다.

한 때 유럽대륙의 패권국가였던 스페인이 다른 국가들에 의해 영토가 찢기는 처지가 된 것입니다. 언젠간 중국도 이런 비슷한 유형으로 산산조각이 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해 봅니다.

반응형
댓글
공지사항
최근에 올라온 글
최근에 달린 댓글
Total
Today
Yesterday
«   2025/02   »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글 보관함